정치사회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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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북베트남이 독립의 쟁취를 위해 프랑스와 치른 제1차 전쟁, 미국의 비호를 받는 남베트남과 치른 제2차 전쟁으로 구분되며 제2차 전쟁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전장이 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언제 : 1946∼1954년 / 1960∼1975년
어디서 : 베트남 / 베트남
누가 : 프랑스군과 베트민 / 베트콩과 미국정규군
무엇을 : 베트민군과의 전쟁 / 베트콩과의 전쟁
왜 : 프랑스에 대한 독립 / 미국의 대공산주의의 봉쇄전략
베트남전쟁은 '30년전쟁'이라고도 부르며 2차 전쟁으로 구분한다. 1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46~1956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프랑스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하며, 2차 전쟁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60~197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국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2차에 일어난 전쟁을 통틀어 베트남전쟁 또는 30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들어와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며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불리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베트남 내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프랑스세력을 몰아내고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도차이나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ochina)이 1930년에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베트남 독립연맹인 베트민(Viet Minh)을 결정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8월혁명'이라고 부른다. 8월혁명은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운동이지만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구성원이 결집하여 일어난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베트남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각하였고 하노이, 후에, 사이공 등에서 성공적인 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해 9월 2일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였다. 호치민은 맑스 사상을 공유한 공산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저항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1946년 말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 무력 충돌을 제1차 베트남 전쟁(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9년간 지속됐다. 1950년대부터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프랑스는 베트민을 압도하지 못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실질적인 자신의 토지를 받은 농민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고 그로 인해 병력을 동원하는 막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런 토지라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전쟁참여와 게릴라전을 프랑스군은 감당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군사작전에서도 실패를 하였는데 라오스 국경 부근 디엔비엔푸에 집결하여 이곳으로 베트남군을 유인해 한번에 괴멸시키려는 계획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한곳에 집결된 좋은 목표물이 되고 말았다. 뿐만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제네바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국제회담(제네바극동평화회의)이 성사됨에 따라 프랑스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베트민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전쟁이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세력의 확대를 희망하며 베트민에게 1956년에 실시될 베트남 남북총선 이전까지 위도 17도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분할 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과의 전면적인 확전을 우려하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으로 이를 받아 들였다.
이에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구분되어 통치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후원을 받아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1955년 건국되었다. 디엠 정권은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할량받은 농민에게서 다시 토지를 회수하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억압했다. 표면적인 안정을 이루었지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것이며 점차 정권의 취약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디엠 정권은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된 베트남 남과 북의 총선 실시 조항을 거부하고 미국의 후원을 받아 남베트남 내 노동당 운동원과 그 지부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시작했다. 1958년 12월 1일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반공법이 시행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제2막은 노동당을 중심으로 응오 딘 디엠 정권에 대항하고, 베트남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제네바협정에서 약속한 통일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노동당 조직이 축소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남베트남에서는 메콩강 하류 델타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 점차 확산되었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 NLF)이 결성되었다. 디엠 정권(사이공 정부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때까지 베트남 북부에서는 본격 개입하지 않았다. 1963년 사이공에서는 불교도들의 시위와 분신자살이 발생했고, 미국도 디엠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인가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1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디엠 대통령이 암살되고 인해 남베트남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새로 집권한 군사 정권이 NLF(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에 대해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자 미국은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남베트남 혁명세력의 공세가 점점 강해지자 미국은 베트남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하는 이른바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64년 8월 마침내 통킹 만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은 1961년 캐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결정으로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간주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여 전투력을 상실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북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남베트남군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위해 싸우지 않고 오히려 북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1964년 9월 11일 대한민국은 비전투요원 이동외과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였으며 1965년 3월 10일 공병대가 중심이 된 비둘기부대가 파월되었다. 1965년 10월 맹호부대와 해군 청룡부대가 파견되었으며 1966년 백마부대 등 약 30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전쟁에 파견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군사 및 경제개발과 관련한 조치였으며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1968년 NLF 무장 게릴라는 새해 테트(Tet:구정) 축제를 기점으로 사이공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미국의 주요시설을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했다. 베트남 노동당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내에는 전쟁이 패배할 것이라는 심리적 위축감이 팽배하게 되었다.
미군사령관 웨스트멀랜드(William C. Westmoreland)는 미군의 추가 파병을 요구하였지만 여력이 없는 미국은 이를 거절하였다. 여기에 반전을 요구하는 미국내 여론이 높아지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1968년 11월에 있은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하자 새로 당선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이듬해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며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17도 이남지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북베트남과 대치 국면을 유지해 나갔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자 미국은 B-52폭격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1972년 여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평화교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3년 1월에 있은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하고, 미군 전쟁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북베트남에 요구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닉슨 체제의 정통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이에 따라 사이공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초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였고, 마침내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동 반 민(Dong Van Minh) 대통령이 항복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55만 3천 명의 군 병력을 파견했고, 그 중 5만 8천 명이 사망했다. 남베트남 군은 25만 명 이상 사망했고 NLF 군도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백만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병력을 파견한 대한민국은 약 5000명이 전사하였고 1만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백만 이상이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라오스에는 파텟 라오(Pathet Lao)라는 공산집단이 생겨났고, 캄보디아도 1960년대 공산주의자들이 확대되는 현상이 발생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는 공산주의가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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